원물
동광리는 구전에 의하면 약 170년 전 풍수사가 머물면서 이 일대의 지형지세를 살핀 다음 말하길 "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았다" 한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 설촌터에는 지금도 대나무가 무성하다. 이 마을은 본디 식수원이 없어 마을털로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화전농을 하기에는 매우 적당한 지대여서 바닷가에 살던 이들이 이주했으며 제주 양씨가 이주해온 것을 계기로 마을이 점점 커지니 '자단리'에서 각 마을들이 독립해 나가고 이 지역을 포함하여 '광청리'라고 했다가 다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동쪽에 있는 광청리란 뜻으로 '동광리'라 하게 되었다. 이 마을은 제주의 서부 중산간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산남과 산북을 잇는 지름길이 닦여 있음으로하여 일찍이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창천리는 '포시남마루'라 하여 10여 가호가 모여사는 작은 마을로 조선조 현종 15년(서기 1674년)에 대정현 상모리 강진의 장남 강위빙이 설촌한 마을로 내에 창고처럼 생긴 암굴이 있다 하여 '창고천리'로 불리워지게 되었으며, 1914년 일제강점기에 토지세부측량이 실시되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창천리'로 바꿔 부르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강위빙이 맨 처음 이주하여 정착한 곳은 창천리 160번지 일대라고 한다. 이 창고내를 따라 하류에 이르면 원시주거형태의 하나인 바위그늘집터가 여러군데 산재하여 고고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데 바위그늘집이란 선사시대 사람이 거주했던 곳으로 제주어로는 '엉' 또는 '엉덕'이라고 부른다.